Day 40

또 다른 사순절 (마 27:57-66)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은 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금요일과 내일 부활하시는 부활절 그 중간에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인생과 참 많이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순간이기에, 믿음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려야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박히도록 음모를 꾸몄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선, 혹시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서 거짓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까 두려워하여 경비병을 무덤 앞에 세워둡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해야할 제자들의 모습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그들의 믿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눈으로 보는 믿음이었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줄 아는 참된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하여서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은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늘과 같은 순간을 위하여서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있을 제자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신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믿으면, 부활하실 예수님을 담대함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확실하게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나는 승리하리라>라고 믿음으로 선포하며 참된 승리의 기쁨을 오늘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로써, 2016년의 사순절은 마치게 되지만, 우리 인생의 사순절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늘 참된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Day 39

십자가 그 사랑 (사 53:1-12)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오늘은 좋은 금요일입니다. 영어로 Good Friday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오늘이 좋은 날이십니까?

혹시 십자가를 바라봐도 아무런 감격이 없다면, 오늘만큼은 예수님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저녁엔 4살짜리 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딸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예수님 너무 불쌍해, 나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죽으신거잖아>라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꼬옥 안아줬더니, 이번엔 조금 더 격하게 울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죄송해요>

그런 아이를 달래주는데, 괜시리 눈물이 났습니다. <나에겐 왜 이런 눈물이 없을까? 왜 이런 감격이 없을까?> 그러면서 딸아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고 듣고 전하였지만, 나는 <십자가>를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며 살아왔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경책에 기록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사순절 서른아홉 번째 날 만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만이라도 바라보시며,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는 참된 기쁜 날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십자가 그 사랑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무너진 나의 삶속에 잊혀진 주 은혜

돌 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주 나를 보호 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주 나를 보호 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Day 38

빌라도와 예수님 (마 27:11-26)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느냐 혹은 놔주느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근데 여기에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언급하는 빌라도가 등장을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정말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언급하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다가, 예수님이 죄 없으심을 깨닫고 자신의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라고 말한 사람일 뿐인데 말입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옳은 길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그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게 무슨 문제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 23절에 보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사람들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보다는 계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만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은 사사기에 기록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면, 빌라도는 옳은 결정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죽을 죄에서 고난 받을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택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욱 잘아시며 더욱 사랑하시는 분>이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라고 외칠 때에도,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한국에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는 마지막 예배때에 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마지막으로 전해주셨습니다. <교회를 필요로하는 목회자가 되지말고, 교회가 필요로하는 목회자가 되어야한다.> 당시에는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실하게 이해가 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서 우리를 이용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다는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순절 서른여덟 번째 날에는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귀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37

사소한 순간에 예수님을 인정하기 (마 26:69-75)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의 세번 부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4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래서 어떠한 순간에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결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그의 여종을 만났습니다. 이 여종은 베드로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소>라고 여종이 말하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예수님을 무슨 일을 당하고 계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67-68절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하여서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며,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맞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이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순간이라고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할 것이며 인정할 것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은 오늘의 본문처럼 <사소한> 순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사소한>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척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베드로는 사소해 보이는 여종 앞에서 부인하였기 때문에 곧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개를 키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로워서 키우시는 분도 계시고, 개가 좋아서 키우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개가 자기 주인을 모른척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주인이 기쁠때나 슬플때나, 건강할때나 약할때나 늘 애완견은 자신의 주인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주인은 더욱 마음을 자신의 애완견에게 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사소한>순간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다짐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서른일곱 번째날에는 오늘도 <나>를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우리가 부인하지 않는 부끄럽지 않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36

칼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짊어지라 (마 26:47-56)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처럼 체포를 당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는 분이시지만 체포를 당하십니다. 왜냐하면 <칼>을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시려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지만, 오늘 56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순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랐던 제자들도 이러한데,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칼>을 내려놓고, 우리로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칼>을 들게되면 망하게 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면 참된 승리를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칼>을 들고 있어야 안심을 하며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내가 더 날카롭고 긴 <칼>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며 상대방이 자신을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칼>은 누구에게는 돈이며, 명예이며, 권력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칼>을 내려놓아야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들고있는 것이, 혹은 들고자 하는 것이 <칼>인지 <십자가>인지를 오늘 다시 한번 확인해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칼>을 들면 망하게 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의 기쁨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사순절 서른여섯 번째 날에는 모두다 <칼>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버리지 아니하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35

나를 굴복시키는 기도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겟세마네에 오르셔서 세번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마주하게 된 고난을 앞두고 너무 큰 고통과 번민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첫번째로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다시 두번째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번째의 기도는 첫번째와 조금 달라진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에서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첫번째 기도는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였지만, 두번째 기도는 <잔이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조금더 순종하는 기도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신 <약속의 성취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아셨습니다. 그 길을 걷지 않고서는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 길을 걷기로 순종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즉, 예수님의 피흘림이 없이는 우리가 죄 사함을 얻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함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 그대로 고난의 잔을 받기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하는대로 응답받는 받는 사람을 <능력있는 기도자>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반면에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한 사람을 <능력없는 기도자>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예수님은 <능력없는 기도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오히려 설득 당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기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 서른다섯 번째 날에는 기도함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할 길을 걸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Day 34

나를 아시는 하나님 (시 139편)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굉장히 그리워합니다. 특히 나에 대해서 일일이 말하지 않더라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요즘은 자신의 일상을 인터넷과 스마트폰등을 통하여서 쉽게 공유할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서 많이 외로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편안함을 느끼며 만족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시편 139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13절에 의하면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우리 몸 속의 혈관은 9만 6천 km, 마일로는 6만 마일정도로 긴데, 이 길이는 지구를 2바퀴 반이나 감을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육체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우리의 마음 혹은 우리의 갈 길을 어찌 우리가 알겠습니까?

잠언 16장 9절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그분께 우리는 숨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보다 더욱 사랑하여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단연코, 하나님같은 분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이 찬양의 가사처럼, 진정으로 우리를 알아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사순절 서른네 번째 날에는 내 마음을 만지시며, <나를 알아주는 하나님>을 만나셔서, 참된 위로와 안식을 누리시는 귀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33

주님께 드리는 삶 (마 26: 1-16)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전의 마지막 순간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제사장들, 향유옥합을 드린 여자 그리고 가롯 유다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예배를 담당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위치가 위협 받을까봐 걱정하며 흉계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세력입니다. 그리고 한 여자는 자신의 전부인 것과 같은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자의 이 모습이 영원토록 기억이 될 것이라는 복을 내리십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3년동안 함께 지내었던 제자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보이시고, 누구에게 감추신 일 없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평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서 대하는 자였지만 안타깝게도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였고, 제자 가롯 유다는 예수님 가장 가까이서 모든 일들을 목격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와 반면에 제자들도 깜짝 놀랄정도로 귀한 향유 옥합을 예수님께 아낌없이 드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누군가는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빼앗길 것을 염려하고 예수님을 통하여서 받을 것만을 생각하는데, 어느 누군가는 예수님께 더욱 드리길 원하는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에 시간과 물질이 부족하게 되면, 당연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가장 먼저 줄입니다. 시간이 부족하면 예배 드리는 시간을 줄이고, 물질이 부족하면 헌금을 최우선적으로 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낌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이라도 드리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우리가 아낌없이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히 영원토록 기억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순절 서른세 번째 날인 오늘 하루 만큼은 조금이라도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우리의 향유옥합처럼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Day 32

작은 자를 보게 하소서 (마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양과 염소를 통하여서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최후의 심판의 때에 임금의 오른 편에 있을 양들은 작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베푼 자들이지만,

왼 편에 있을 염소들은 작은 자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던 자들이라고 구분하십니다. 이와같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하였는지와 아닌지가 심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양들은 의인이어서 영생에 들어가지만, 염소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어서 영벌에 처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할 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서 불안해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엔 우리는 모른 척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작은 자>를 보내어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작은 자>를 섬기어서, 하나님 우편에 앉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자>를 만났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도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지만, 우리가 가끔 무시하였던 그 <작은 자>를 위해서도 분명히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작은 자>를 위하여서도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작은 자>를 잘 섬겨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믿음이란 작은 것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작은 자를 큰 자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이웃에게 퍼져나가길 원하십니다. 나의 믿음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믿음은 금새 식을 수 있지만, 남의 믿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믿음은 쉽게 식어지지 않습니다. 왜냐 남의 믿음이 우리의 사랑 때문에 뜨거워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순절 서른두 번째 날에는 우리 주변의 <작은 자>를 크게 보는 사랑의 눈을 허락하여 달라고 기도하시며, 또한 그들에게 아낌없이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작은 자>를 섬기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31

공평하신 하나님 (마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오늘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주인은 세명의 종들을 불러서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다시 돌아왔을 땐,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은 자들은 각자 두배의 달란트를 남겼지만, 1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냥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혼이 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를 대하면서 왜 1달란트 받은 자는 그걸 땅에 묻어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1달란트는 20년정도의 연봉을 의미합니다. 한화로는 13억원, 미국 달러로는 100만불 정도를 의미합니다.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에게 갑자기 100만불을 준다면 우리 중에 감사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서 200만불, 500만불을 누가 받는다면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100만불이 감사의 제목에서 불평의 제목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분명히 절대적으로 해야합니다. 하지만, 감사를 주위 사람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하게된다면, 불안한 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불안한 감사가 되냐면, 나보다 적은 것을 받은 사람 앞에서는 감사할 수 있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나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감사가 곧 원망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내게 족한 은혜>라고 믿으며 감사해야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날 때부터 소아마비로 태어나서, 평생을 장애로 안고 살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전신마비까지 가지게 된 송명희 시인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지은 <나>라는 찬양의 가사는 아무나 쉽게 고백할 수 없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가 우리의 고백이 되기까지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길 기도합니다.

송명희 시인 <나>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만한 복의 크기를 아시기에,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감사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순절 서른한 번째 날에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으로 변화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