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0

부지런한 사람이 됩시다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열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신랑이 왔을 때 그제서야 기름을 사러가느라 혼인잔치에 못들어갔습니다. 반면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가 신랑이 왔을 때 기쁘게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준비된 자를 예수님은 슬기 있는 자라고 하며, 준비되지 못한 자를 미련한 자라고 구분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주변에 돌아보면, 늘 언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준비가 되어있는 듯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반면에, 늘 언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허둥대는 사람도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일이 적어서 준비가 잘된 것도 아니고, 일이 많아서 준비가 안 된 것도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일이 많고 적어서가 아니라, 부지런하고 게으른 차이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일이 많아보이지만, 늘 여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게으른 사람은 일은 별로 많아보이지 않지만 늘 바빠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쁜 사람들이 절대 일이 많아서 바쁜게 아니라, 게을러서 바빠 보이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늘 바쁘다고 말을 하고 다니지만, 막상 일은 안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밖에서 일이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한가하다고 절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부지런히 주어지는 일들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신랑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당연히 부지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부지런히 준비하고 예수님 만날 순간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서른 번째 날에는 우리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다가, 우리의 삶 가운데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만나는 귀한 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Day 29

진짜 하나님을 믿는 진짜 크리스챤 (마 24:3-14)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현 시대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어서 놀라게 됩니다.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칭하면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모습이라든지, 거짓선지자가 일어나 불법을 행하는 모습은 우리가 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이 시대가 마지막 시대인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초대교회때부터 지금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짓선지자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늘 거짓선지자와 함께 하여왔습니다.

그럼 왜 거짓선지자가 생기는 것일까요? 거짓이라는 것은 사실 진짜가 있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진짜가 없다면 거짓이라는 개념도 존재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시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이기 때문에, 이를 빙자한 거짓 선지자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토대로 자신들의 교리를 세워가는 것과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18절
16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후서 말씀에 의하면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뜻대로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빠지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뜻대로 억지로 풀면 우리가 거짓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리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의 유익을 위하여서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을 기억하여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려고 하는 미혹으로부터 견뎌내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됩니다. 사순절 스물아홉번째의 날에는 하나님의 진짜 복음을 온전히 사모하는 진짜 크리스챤의 모습을 회복하는 은혜의 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Day 28

자기를 낮추는 사람 (마 23:1-12)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서 모여있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하니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삶이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이라고 빌립보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한글로 볼 때 <낫게>와 <낮게>는 발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뜻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살아가야하는데, 우리는 종종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교만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낫게>와 <낮게>를 우리는 분명히 구별하여야, 우리는 겸손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랍비나 지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온전히 돌려드려야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자녀된 삶입니다. 이단의 교주들은, 성경으로 시작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에 욕심을 내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아야할 박수를 대신 받고 있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겸손의 최고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호텔이 아니라, 마굿간이었음에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찾아가신 사람은 세상에서 높은 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순절 스물여덟번째 날에는 낮은 곳에 거할 때 그곳에서 우리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소망합니다.

 

Day 27

가장 큰 계명 (마 22:34-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율법사에게 오히려 사랑의 계명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을 듣고 분명히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 자신이 생각하는 율법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믿음 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13장 8-10절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사가 모르고 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사의 신앙생활은 점점 메말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그런 신앙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참 잘하고 있는척 하지만, 사실 허무함에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자신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베푸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의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받을 것을 생각하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신게 아닙니다. 그저 베풀어주시는 사랑, 율법을 뛰어넘는 진정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35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순절 스물일곱번 째 날에는 하나님께 받을 것을 구하기 보다는, 내게 도움이 되는 이웃만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그저 베푸는 사랑을 하시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26

삶의 기준 (마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수님은 천국은 혼인잔치와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근데 그냥 혼인잔치가 아니라,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베풀어주는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음식이 준비가 되었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서 수고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려고 종들을 보내었는데, 사람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하러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생각만해도 제가 더욱 속상할 것 같습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청첩장을 나눠주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자니 괜히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고, 또 안 주자니 상대방이 섭섭해할 것 같고, 인간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근데 만약 이렇게 어렵게 고민해서 결혼식에 초대를 했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일 하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속상했을 것 같습니다.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들은 혼인잔치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도 그들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준은 어떤 판단을 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기준이 없는 사람은 그때 그때 기분에 맞춰서 판단을 하게 되고, 잘못된 기준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고, 제대로 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여야합니다. 다른 어떤 그럴싸한 기준들도 다 흔들리고 변해가지만, 흔들리지 아니하는 영원한 진리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기준이었다면 그들은 모두 천국잔치에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기준이 예수님 이외의 것들인 자녀이거나, 좋은 직장이거나, 좋은 인간관계였다면, 우리도 천국잔치에 못들어가고 슬피 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다른 것으로 우리 삶의 기준을 삼으면, 우리는 생수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 스스로의 웅덩이 안의 썩어가는 물을 마시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순절 스물여섯번 째 날에는 우리의 삶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Day 25

모퉁이돌 (마 21:33-45)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의 농부들을 통하여서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집을 떠난 주인은 받을 열매를 위하여 종들을 보내었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죽이고 맙니다. 근데 주인은 아주 놀라운 아니 오히려 이상한 결정을 합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자신이 보낸 종들을 모두 죽인 농부들에게 주인은 왜 아들을 다시 보낸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긴 한 것일까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농부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정확히 나오진 않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에 마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사람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도 흉악하였고, 지금도 계속 완악하여져만 가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를 하나님 말씀 말고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농부에게 아들을 보낸 것은 이해가 되지 않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은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단순한 성경구절이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닿는 분은 복 받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저 성경 말씀이 뻔하게 느껴지시는 분은 다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도 농부처럼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손과 발에 못을 밖아 죽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사실 버려져야 마땅한 돌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마치 모퉁이의 머릿돌 자리가 원래 우리 자리였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버림을 받게 됩니다. 사순절 스물다섯번째 날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마음은 내려놓고, 감사함을 다시 회복하는 귀한 날이 되길 소망합니다.

Day 24

미움 받을 용기 (마 21:23-27)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가 있어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였을 때, 예수님은 오히려 질문을 다시 하셨습니다. <너희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예수님이 어떠한 의도로 이 질문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혼자서 이리저리 생각을 하다가 결국엔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어느쪽에서도 싫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원망을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가족들에게 배척을 당하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도 많은 사람의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책 중에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을 우연히 접하면서 참 느껴지는게 많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일 하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만 받을려고 하지, 욕 먹는 일은 기필코 피할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칭찬은 내가 듣기를 원하지만, 욕은 나 대신에 남이 대신 들어주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복음을 위하여서 때론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의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였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식하는 사람에겐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이란 정말 걸어내기 힘든 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발걸음은 계속 휘청거리며 흔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스물네번 째날에는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위하여서 고난을 당하는 일을 피하지 아니하는 순교자의 삶을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Day 23

하나님의 성전 (마 21:12-17)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청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을 치우시고, 성전을 온전하게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때에 어린아이들은 예수님께 찬송을 올렸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화를 내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대제상들과 서기관들은 같은 일을 만나도, 생각하는 것은 달랐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은 누구입니까? 교회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때론 좋지만, 자신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점에서 좋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깨끗할 필요성을 못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괜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 깜짝 놀란 것은 한국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차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국보다 환경이 깨끗하여져서 세차할 필요성이 없다고는 하지만, 세차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습니다. 사실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더럽게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면 때론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평소에 괜찮아보이던 나의 삶이 그렇지 않아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기를 기뻐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였던 적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깨끗하길 원하셨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듯이,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더러운 우리를 깨닫고 십자가 밑에 엎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 스물세번째 날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가 더러움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보혈로 어제보다 더욱 깨끗하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Day 22

기쁨의 노래 (시편 95편)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가끔 엄청난 경치를 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한 장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되며 또한 우리의 작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같이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앞에 엎드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8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피조물인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지면,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므리바와 맛사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야합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하며 다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호렙산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고 그곳 이름을 맛사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시험하였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즉, 피조물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달랐습니다.

욥기 1장 21-22절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의로운 사람 욥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거두어가실 때에도 하나님께 원망대신에 찬송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아시는 하나님은 욥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사탄 앞에서도 자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스물두번째 날에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여서, 하나님께 원망 보다는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을 돌려드리는 귀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21

포도원 일꾼의 비유 (마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한국에 있는 이단중에 한 곳은 천국은 선착순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은 12지파에서 총 선착순 144,000명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선착순으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모두 1등입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 복음을 들은 자와 죽기전에 하나님을 영접한 자, 모두 하나님께는 귀한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참 순서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뒤에서면 굉장히 초조해하고, 남들보다 앞에서면 굉장히 우쭐해합니다. 교회에서도 역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이 있는 교회든, 이제 막 시작하는 교회든 상관없이, 자신이 얼마동안 교회를 섬겼는지를 자랑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교회를 섬기는 시기는 우리의 계획 가운데에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섬겼던 기간이 아닙니다. 다시말하자면, 먼저 부름 받은 사람도 나중에 부름 받은 사람도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해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온 자는 겸손함으로 나중 온 자는 감사함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속한 모든 곳이 하늘 나라처럼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사순절 스물한번째 날에는 받아야할 것만을 간구하기 보다는, 이미 주신 것을 돌아보며 감사함으로 은혜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