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0

부자 청년 (마 19:16-30)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전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주된 사역중의 하나가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위하여 VBS를 열어주었던 일입니다. 다들 한참을 걸어서 VBS에 나왔기 때문에 VBS를 마치고 트럭 뒤에다가 아이들을 잔뜩 태워서 집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근데 한 아이가 트럭에서 계속 불안하게 서있어서 물어보니, VBS 마치며 나눠줬던 간식을 집에 있는 자기 동생들에게 가져다 준다고 양손 가득 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기특하고 예뻐보였지만, 그래도 간식 잠시 내려놓고 트럭 손잡이를 꽉 붙잡지 않으면 넘어진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가던 트럭이 덜컹거리자 그 친구는 넘어지면서 간식으로 받은 빵과 설탕 음료수를 떨어뜨리면서 그 위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울고있는 그 친구에게 남았던 간식을 다시 주며 겨우 달래주었지만 마음은 편치 못하였습니다.

 제가 볼 땐 참 별 것 아닌 <빵과 설탕 음료수>였지만, 그 친구에겐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트럭 손잡이를 붙잡지 못하고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그 간식을 대신 붙잡고 있었습니다. 결국엔 그 친구는 넘어지면서 간식을 망쳐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모습에서, 제가 붙잡고 싶어서 붙잡고 있었던 그래서 정말 붙잡아야할 것을 못 붙잡았던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얼마나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셨을까? 또, 결국엔 넘어지는 나를 보면서 얼마나 속상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돈이 많은 사람을 <잘~산다>라고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손에 쥔 것이 많은 사람을 그래서 부러워할 때도 있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3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즉 이 말씀은 손에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손을 붙잡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손에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내려놀 것이 없어서 참 편하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전부인 것처럼 더 꽉쥐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 손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내려놓고 예수님 손을 붙잡아야 이 세상 어느 곳에 우리가 거할지라도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러워해야할 사람은 많은 물질과 건강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어야합니다. 사순절 스무번째 날에는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정말 붙잡고 있어야하는 것인지 다시 돌아보시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19

하나님의 적극적인 용서, "예수 그리스도" (마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는 용서 받는데에 익숙하지만, 용서 해주는데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조금 용서할 일이 생기면 굉장히 큰 일을 해결해야 할 것처럼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을 고백할 때에는 식사기도만큼이나 익숙하고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5절을 보면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신다" 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리는 지금 껏 살면서 "마음으로부터" 몇명의 사람을 용서해주며 살아왔을까요? 아마 베드로의 일곱번 보다 큰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용서해준 척 한 적은 많았지만,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를 이사야서를 통하여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는 적극적인 용서라는 것입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라는 고백을 종이 해야지만 주인이 마지못해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얼마인지 모를정도로 많을지라도 한번 나랑 이야기해보자. 내가 다 용서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은 우리가 청해서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용서"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허다하기에, 어디에서부터 회개해야할 지 모르는 우리를 아시기에,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순절 열아홉번째 날에는 용서를 받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도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누군가를 용서해줄 수 있는 기적의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Day 18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마 18:10-14)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어릴적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 지구상에 나 혼자 산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을까?'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그 목사님을, 신실하게 늘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그 장로님, 사랑이 많으신 그 권사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보내주셨겠지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보내주셨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하나님은 분명히 그러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에도, 어두운 곳에 숨어 있을 때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분명히 나에게 다가와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라고 속삭여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를 사랑하시기 보다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우리는 감사도 할 수 있고 회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눈을 들어서 십자가에서 <나>를 그윽하게 사랑의 눈길로 쳐다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를 천하보다 귀하게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사순절 열여덟번째 날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Day 17

자신을 낮추는 사람 (마 18:1-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평소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신만만한 사람도, 고난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겸손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질병을 얻기전까지 겸손할 필요를 모른체 살아왔었지만, 육신의 연약함을 마주한 이후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많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사순절에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어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사순절에 금식을 하는 분들이 계실텐데, 아마 다들 식사 한끼 앞에 무너지는 자신의 연약함을 많이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자랑했던 건강도, 밥 한술 위에 쌓아왔던 부질없던 것임을 알게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다시말하자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능하심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고난을 당하는 분들은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고난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일들을 만나지 못한 분들은 스스로 낮추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특히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시는 분들은 더욱 스스로를 낮추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순절 열일곱번째날에는 주어지는 십자가의 무게로 자신을 낮춤으로 말미암아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시는 복된 날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Day 16

양들의 고백 (시편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진정으로 고백하며 사는 것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양들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양과 목자의 관계에 대하여서 굉장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은 자신을 양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시편 23편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며, 목자 없이는 쉽게 길을 잃어 음침한 골짜기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근데 양이 스스로 강한 척, 아는 척하면 할수록 목자를 따라가지 않게되어 양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양으로 인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길을 잃게 되기 마련입니다. 자식이 자라서 부모가 되어봐야 자신의 부모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듯이, 다윗은 자신이 목자가 되어봤기에 진정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목자였던 다윗은 자신이 사실은 양이며 하나님이 진짜 목자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 진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자신의 양을 돌보면서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진짜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목자를 만나야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열여섯번째날에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인정하여 부족함이 전혀없는 하루를 보내시길 축복합니다.

Day 15

베드로의 고백 (마 16:15-21)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물어봅니다. 이에 제자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러한 메시야가 아니라, 선지자 중의 한명으로 고백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원하시던 대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보시면 무엇이라 대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17절에 의하면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베드로가 스스로 알게 되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베드로에게 알게 하여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복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나의 주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음에 감사해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위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믿음위에 세워졌을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순절 열다섯번째날에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돌아보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14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 (마 14:15-21)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저녁이 되어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자들이 나아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아마 이 말을 했던 제자는 제자들중에 머리가 좋고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제자였을 것입니다.

현재 상황이 해가 져가는데 무리들은 배가 고파오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마을에 가서 먹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제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에게 아주 짧게 대답하십니다. "갈 것 없다" 그리고 조금 당황스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도 아니고, 마을에 가서 먹게 해달라고 했던 제자에게, 도리어 <너희가 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우리가 가진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라고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로 답변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음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어드리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진짜 누구인지를 기억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알아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사순절 열넷째날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 하루를 채우기 보다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하루를 채우시길 소망합니다.

Day 13

천국을 보는 안목(마 13:44-50)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오늘은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바라봐야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세가지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번째는 남의 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이고 두번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이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삽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바닷에 던져놓은 그물 중에서 좋은 것은 담고 못된 것은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먼저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물을 보고도 보물인지 모르는 사람은 보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기가 막힌 뉴스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 어떤 사람이 자기 집 창고에 허드레 물건을 내놓고 파는 창고 판매에서 누군가가 3달러를 주고 도자기 하나를 샀답니다.

그렇게 구한 도자기를 집 거실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도자기 그릇의 가치가 궁금해진 주인은 감정 전문가를 찾아갔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는 도자기를 경매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도자기의 경매 가격은 무려 222만 5천 달러(24억 8천만 원),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상아색 빛깔을 가진 그 그릇은 알고 보니 1천 년 전 중국 송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희귀한 도자기였던 것입니다.

같은 물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허드레 물건이고, 누군가에게는 희귀한 도자기였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그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천국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보물이 뭍혀있던 밭주인은 수없이 그 밭을 둘러봤었지만 그 보물을 몰라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보물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좋은 눈이 있어도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천국은 어떠한 것입니까? 흔하디 흔한 논밭의 돌덩어리로 혹시 천국을 가볍게 여기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천국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 천국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셨습니까? 사순절 열세번째날에는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그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믿음의 승부가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Day 12

마음에 뿌려진 것(마 13:24-33)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세가지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가라지, 다른 하나는 겨자씨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누룩입니다. 비유로 드신 셋의 공통점은 매우 작다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뭔지 모르정도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열매를 거둘 때에는 무엇이 심기어졌는지 그 결과가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아무리 좋은 밭에 좋은 씨앗이 심기어져 있어도, 가라지와 함께 심겨지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것을 섞어서 심으면 안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라지가 심기어지지 않도록 늘 마음의 밭을 잘 단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7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두번째로 겨자씨를 언급하시면서, 모든 씨보다 작지만 후에는 큰 나무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복음은 처음엔 예수님을 통하여 연약하게 심기어졌지만 후에는 크게 퍼져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은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어보이지만 내일에 소망을 두고 오늘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둘 것이 많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26편 6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세번째로 누룩은 조그만 것을 크게 보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조그만 악도 크게 보며 경계를 하며, 조그만 선도 크게 보며 가까이 하는 것이 늘 언제나 천국을 마음에 소유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19절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처음은 비슷하지만 끝이 다른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이 이단도 처음엔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해보이는 말을 하지만, 정말 후에는 그 열매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씀의 씨앗을 품고 있는지 지금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작게 보기도 하고, 남들을 크게 보기도 하며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참된 복음의 씨앗이 심겨져 있는 것을 믿으며 마음의 밭을 지키는 사람은 훗날에 많은 열매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거두게 하십니다. 사순절 열두번째날에는 내 마음에 무엇이 심겨져 있는지 살펴보시며 천국의 삶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Day 11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 13:10-23)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닫는 자는 깨닫고 은혜를 받지만, 못깨닫는 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못 깨닫는 사람은 그들이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15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말하자면 은혜 받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사순절 묵상을 하는 우리는 이미 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루의 바쁜 삶 속에서 이렇게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묵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18절이하로 깨닫고 못깨닫고, 은혜를 받고 못받고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같은 씨가 뿌려졌지만 어떤 마음의 밭은 악한 자에게 금방 뺏기고, 또 어떤 마음의 밭은 돌 같아서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또 어떤 마음의 밭은 염려와 유혹 때문에 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세가지 마음의 밭은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의 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마음의 밭은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평범한 말씀에도 큰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어떠한 말씀의 씨앗이라도 뿌려질지라도 뿌리가 잘 내려지고 잘 자라나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는 시간입니다. 기경한다는 것은 밭을 뒤집어서 땅이 숨을 쉬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겨울내내 굳어져버린 땅에 그대로 씨를 뿌리면 절대 잘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 부드럽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10장 12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자신의 삶을 갈아엎으려는 의지가 없는 우리의 마음 밭을 십자가로 갈아엎어야합니다. 사순절 열한번째 날에는 나의 굳어진 마음이 갈아엎어져서 좋은 마음 밭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충만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