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0

광야에서 불러야할 우리들의 시편 (시편 63:1-7)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다니면서 유대광야에서 지은 시입니다. 통일왕국을 이룬 왕이 갑자기 아들 때문에 다시 도망을 다녀야하는 신세가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 사실 유대광야는 정말 물이 없어서 땅이 갈라져있는 황폐한 곳입니다. 유대광야에서 도망치고 있는 다윗의 영혼도 육체도 광야처럼 메말라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다윗은 1절에서처럼 "하나님이여" 라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근데 2절의 내용을 살펴보니, 다윗은 자신이 힘들어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을 때 만났던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유대광야에서 회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것은 막막한 광야에서 메말라버린 인생을 바라보며 괴로워하기 보다는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하였던 그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광야에서 부른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 길에서 광야를 만났을 때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까요? 당신은 인생의 황폐한 순간에서 누구를 찾아야겠습니까? 다윗은 메마른 광야에서 시냇물 찾는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시편 42편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다윗은 사슴처럼 절박하게 자신의 인생의 시냇물이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절박한 사람은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목말라 어찌할바를 모르는 사슴이 어떻게 게으름을 피우며 시냇물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그 은혜 아니고선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막막한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던 다윗은 오늘 본문 7절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도움이 되어주셨으며, 하나님의 날개에서 다윗이 즐거이 찬양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사순절 열번째 날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순간들을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에 묻혀, 또 현실에 갇혀 잊고 살아가던 예배의 감격,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레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하게 하나님께 구할 때에 하나님께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Day 9

안식일에 대한 질문 (마태복음 12:1-8)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에게 다윗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비록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었지만 그건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 본문 뒤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1-12절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안식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못지켰을 때 우리에게 벌 주실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근데 바리새인은 율법이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위하여 있는 듯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본질은 보지 못하고, 형식에만 집중하고 있는 바리새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율법에만 집중하여 정말 우리가 바라봐야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뉴욕에서 유대인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우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엘리베이터가 전층에서 서도록 설계돼 있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층수를 누르는 순간,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탈무드에는 안식일에 해야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종류의 일을 정해놓았는데 거기에는 육체적 노동이나 전기기구의 사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엘리베이터를 사보스 엘리베이터라고 합니다.

정말 재밌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황당해하시겠습니까? 근데 우리의 모습 가운데에서도 바리새인 혹은 유대인 같은 모습이 있지 않을까요? 정말 중요한 본질은 다 놓치고 그냥 형식만 붙잡고 겨우 살아가는 모습말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정말 나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더군다나, 자신과 같이 살지 못하는 사람을 오히려 정죄하며 자신이 의롭다고 스스로를 높이며 사는 모습 말입니다. 오늘 사순절 아홉번째 날은 신앙의 형식만 붙들고 있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 다시 신앙의 본질인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날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Day 8

제자들을 보내는 예수님 (마태복음 10:5-15)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보내고 계십니다. 보내시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제자들이 가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 바로 전 마태복음 9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들 같이 고생하는 무리들을 보시게 됩니다. 그래서 10장 초반에 제자들을 부르셔서, 오늘의 본문처럼 드디어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제자들이 10장 16절이하의 내용처럼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바로 제자들이 가야하는 그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니고 핍박과 고난의 길임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삯꾼"이 되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삯"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야지만 주어진 길을 걸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제자들보다 더욱 잘아셨기 때문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이 돈을 사랑하게되면, 돈에 길들여지게 되고, 결국에는 믿음에서 떠나 많은 걱정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넉넉히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명절때 괜찮다는데 더 싸주실려고 온갖 애를 쓰시는 분이 진짜 부모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험하고 먼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잔뜩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시기 보다는 아무 것도 붙잡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이 어찌 부모님보다 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단지 그들의 손에 먹을 것을 가득 쥐어준다고 살아낼 수 있는 삶이 아니란 걸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붙잡아야할 것은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 때, 온전히 가야할 길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을 때에,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온전히 감당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붙잡고 싶은 것을 때론 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험한 광야와 같습니다. 이 광야의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로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아야합니다. 오늘 사순절 여덟번째 날에는 그런 은혜를 깨달아 주어지는 삶에서 승리하는 제자가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Day 7

믿음을 인정받은 백부장 (마태복음 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는 내용입니다. 백부장은 백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인입니다. 그의 집에 한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예수님께 그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뵙자마자 "주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9절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군사를 부리는 사람이기에, "주여" 라고 부르는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세상적인 권위는 내려놓고, 영적인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을 높이는 고백인 것입니다. 자신의 하인을 위하여서, "주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백부장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백부장은 10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8절에 유대인인 예수님이 이방인인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 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을 더욱 낮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더 쉽게 겸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 그것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위기감에 오히려 쉽게 잘 못내려놓습니다.

자신을 쉽게 낮추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열등감에 빠져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얼마되지 않는 것을 내려놓게 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봐 아무 것도 못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부장의 권위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간구하는 백부장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으로써 자신을 낮추는 백부장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내가 주인 삼았던 것을 내려놓아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낮추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높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비워야 예수님으로 가득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 일곱째날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실 수 있는 믿음의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6

기도의 가르침 (마태복음 6:5-8)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오늘 본문의 시작은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에 대하여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의 모습과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의 모습이 비슷해 보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구별하여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에 의하면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의 상은 이 곳에 있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의 상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참 기도의 의미를 모르기에 당연히 중언부언 할 수 밖에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은밀한 곳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봐주는 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기도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가 1, 2부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1부는 새벽 5시, 2부는 새벽 6시였습니다. 1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2부 새벽기도회를 나오시는 분들을 자연스레 마주치게 됩니다.

그땐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왜 그렇게 혼자 뿌듯한지, 왠지 내가 2부를 나오시는 분들보다 더 거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느낌이 좋아서 더 필사적으로 1부를 참석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는 시간보다도, 2부에 나오시는 분들과 마주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정말 시간낭비를 했던 후회가 많이 남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골방에 있을 때에라도, 아무도 없을 때에라도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의 시선은 어디에서나 나를 향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는 누구와 있던 무엇을 하던 그 순간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데리고 자주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는 곳에서 자신은 안보고 다른 사람들만 의식한다면 그건 <쇼윈도우>입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이제 <쇼윈도우> 신앙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우리가 은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든지 바라보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나아오시길 하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곳에서 만난 하나님때문에 정말 기쁜 그런 사순절 여섯째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Day 5

사랑의 가르침 (마태복음 5:38-48)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기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아는 대로 살기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한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굉장히 곤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오늘 말씀이 마음에 걸린다면, 어쩌면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못에 박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처럼만 살아낼 수 있다면, 세상에 예수님을 믿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정말 이상적이고 멋진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정말 그분을 닮지 않았군요. 만약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우리 힌두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순간은 훨씬 빨리 찾아왔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를 원한다면, 오늘 하신 말씀도 우리가 온전히 받아들여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한국에 전라남도 여수라는 곳에 가면 "사랑의 원자탄" 이라는 별명을 가지신 손양원순교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기념관에 가면 손양원목사님의 장례식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엔 왠 훤칠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 남자가 바로 손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라는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손목사님은 이 남자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꺼내어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께 삶을 드리기로 한 안재선씨는 신학대학원을 나와서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근데 문제는 안재선목사님의 아들 안경선목사님이었습니다. 늘 손양원목사님의 용서에 대한 은혜로운 이야기가 전해질 때마다 함께 꼭 등장해야하는 그 살인자, 그 안재선목사님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씨가 어렸을적부터 따라다녔기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안재선씨의 유언대로 목사님이 되었지만, 살인자의 자식이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라는 조롱 속에서 숨죽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도 아닌데,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하는 인생이란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만약 손양원목사님이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엄청 마음 아프게 슬퍼하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만약 예수님이 죗값을 평생토록 치뤄야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다면, 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도 많은 사람들의 조롱속에서 핍박속에서 숨어서 살았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예수님의 크고 높으신 사랑입니다. 오늘은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귀한 기적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Day 4

세상의 빛 (마태복음 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에 빛이 없으면 우리는 어둠속에서 불안에 떨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참된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바로 예수님을 따라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크리스챤 또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로 "우리" 곧 "나" 입니다.

특히 14절의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를 원어로 살펴보면, 그 뜻은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면 자신을 숨기려 해도 두드러질 수밖에 없으며, 어둠 가운데 더욱 밝게 빛나는 빛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입니다.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으면 지금은 보이진 않지만 송곳이 곧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감추려하지만, 우리를 온전히 감출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로부터 온 빛은 우리 안에서 더욱 밝게 빛나서 어둠을 물리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나는 이유는 우리안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둠이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으로 살아내기를 원하십니다. 어둠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드릴 때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순절 넷째날은, 더 이상 어둠에 속한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 거듭나는 귀한 날이 될 줄 믿습니다.

 

Day 3

다윗의 죄에 대한 고백 (시편 51:1-12)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한 후에 선지자 나단이 왔을 때 고백 하였던 시편입니다. 사실 다윗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자신의 죄를 안다고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을 한 것에 가슴을 아파하시지만, 우리가 잘못은 인정하지 않을 때에 더욱 가슴 아파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을 인정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아주십니다. 이는 다윗을 어떻게 사도행전에서 표현하고 계신지 살펴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사실 다윗과 사울 모두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은 사울은 버리시고 다윗은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다윗은 자신이 행하였던 것이 죄악임을 알고,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하였지만, 사울은 죄를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울을 버리고 마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예전 한국에 있을 때, 한 대중교통 버스의 좌석의자 뒷편에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근방의 한 교회에서 전도목적으로 광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그래서 내가 죄를 그렇게 많이 짓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5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죄악 중에서 출생한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요?

본문 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인정해야합니다. 죄악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 앞에서 자신의 병을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그 병이 나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 의사에게 솔직히 말해줘야, 의사가 진찰을 하고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한 다음에는, 그 죄에 대하여 철저히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10절의 고백은 단지 그 순간의 징벌을 모면하기 위한 고백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히 죄를 짓기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하는 중심을 보시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좋은 것을 담기 위해서는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사순절의 은혜를 온전히 담기 위해서는, 내 속의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야합니다. 사순절 셋째날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Day 2

예수님의 첫번째 선포말씀 (마태복음 4:12-17)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첫번째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입니다. 이건 자세히 보면 굉장히 놀라운 선포입니다. 보통, "회개하라" 다음은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라고 해야 자연스러운 문장일텐데,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회개의 필요성을 천국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천국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말 안듣던 우리들을 혼내면서 벌을 주시려고 찾아오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목적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4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이루려 오셨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사야 9장 1-2절의 언약을 이루려고 오셨습니다.

이사야 9장 1-2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속에서,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시사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둠에 오래 있으면, 빛으로 나오기가 주저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에서 빛으로 환경이 달라지면,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그런 우리를 아시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숨어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사망의 땅에서 따라갈 생명의 빛을 허락하신 것 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어제 사순절 묵상을 시작하시면서, 은혜로 하루를 보내신 분도 있을 테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순절 묵상 때문에, 몸과 마음이 피곤하셔서 이대로 포기할까 고민하는 분들도 분명히 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어둠에 익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 우리에게 한줄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느리지만 한걸음씩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내는 사순절 둘째날이 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Day 1

예수의 시험받으심 (마태복음 4: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가장 처음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부터 시작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들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서 어렵지 않게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당연히 마귀는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으로 무엇인가 하려 할 때 어려운 일을 만나게되면, 이렇게 생각해 보시는게 좋습니다.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아니면 마귀가 기뻐할까?” 그럼에도 시험을 이기기 어렵다면, 오늘 예수님이 시험을 어떻게 이겼는지 묵상을 하시면, 이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첫번째 시험에서, 밤낮으로 금식한 예수님에게 마귀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영리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에 약한지 어떻게하면 우리가 넘어질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육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으로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은 육의 양식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으로 사는 방법을 깨닫는 우리가 되길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두번째 시험에서, 마귀가 시험한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드러내기 보다는, 우리를 드러내며 살게 하려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잠언 16장 18절에 나온 말씀처럼, 마귀는 우리로 우리 스스로를 자랑하게 하여 넘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해야합니다. 사순절 기간, 묵상하는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묵상을 통하여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만 전하여야 합니다.

세번째 시험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엎드리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쉬운 방법을 제안합니다.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마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우리의 눈이 찾고 있다는 것을 마귀가 모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무릎 꿇기 보다는 하나님께 무릎 꿇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사순절 기간 하나님께만 무릎 꿇는 주님의 자녀들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사순절 기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많은 시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처럼,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무릎 꿇는 기도로써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